“...친구와 헤어져 오래되어 생각지 못했는데, ... 근래 매일 매일 물러났으니, 어느 때 뜻을 펼치겠는가, 특별히 한스런 것은 내가 양 귀가 먹어 듣지 못하니 사람의 도리를 못한다네, 다만 죽지 못할 뿐이라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벗에게 보내는 안부편지를 비롯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2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2점, 구계(癯溪) 권상유(權尙游),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 2점,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2점, 애일당(愛日堂) 민진강(閔鎭綱), 포옹(抱翁) 정양(鄭瀁) 2점, 태백산인(太白山人) 정보연(鄭普衍) 2점,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4점, 갑봉(甲峯) 김우항(金宇杭), 한주(韓州) 이집(李潗) 2점, 귀락당(歸樂堂) 이만성(李晩成), 소재(踈齋) 이이명(李頤命), 이유민,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귀애(龜厓) 이완(李琓), 지평(持平) 이정주(李挺周), 강린(姜潾) 등의 간찰 30점이다.
1)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간찰
내용을 보면 [친구와 헤어져 오래되어 생각지 못했는데, ... 근래 매일 매일 물러났으니, 어느 때 뜻을 펼치겠는가, 특별히 한스런 것은 내가 양 귀가 먹어 듣지 못하니 사람의 도리를 못한다네, 다만 죽지 못할 뿐이라네...] 친구에게 보내는 안부편지이다.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74년(선조 7) 황해도 도사가 되어 병정을 정비했고, 1587년 안주목사로서 기민 구휼과 민생 안정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나자 명장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탈환했고 1595년에는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일했다. 광해군 재위기에 왕에게 올린 직언이 수용되지 않자 병을 이유로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청빈했고 인조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다.
2-1)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간찰
고급색지에 썼다.
조선의 문신 겸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의 대가이자, 송자(宋子)라고 존칭 받은 대학자(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정치인, 시인, 서예가, 교육자, 작가)로 당색은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학자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에 배향 되었고 사후에는 신하로서의 최고 영예인 종묘에도 함께 종사 되었으니, 은진 송씨는 6대 국반(國班) 중 하나이다.
2-1)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간찰(임인, 1662)
3)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간찰(갑자, 1624)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유학자·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4-1)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간찰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교육자로 효종, 현종, 숙종 때의 성리학자였다. 송시열, 송준길의 문하생이다. 한성부 출신. 호는 수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통이자 그 지도자로서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했다.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였으며, 그의 유언을 받들어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웠다. 자신의 동생이기도 한 성리학자 겸 문신 권상유의 형이자 스승이었다.
4-2)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간찰(임진, 1712)
4-3)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간찰(병신, 1716)
5) 구계(癯溪) 권상유(權尙游, 1656~1724)의 간찰(병신, 1716)
조선 후기에, 대사간,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703년 수원부사가 되어 관리의 비행을 숙정(肅正)하는 등 치적을 남겼고, 1704년 대사간이 되고, 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공조참의 등을 거쳐 전라관찰사가 되었다. 1709년 개성유수를 거쳐 평안감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의(公議)에 따라 대사성으로 옮긴 뒤 도승지가 되었다. 1715년 형조판서, 1716년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예조판서·한성판윤·우참찬 등을 지냈다. 그 뒤 이조판서가 되어 숨은 인재를 많이 등용했으나, 1721년(경종 1) 신임사화 때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 죄인을 한성부의 사대문 밖으로 추방하는 형벌)을 당했다가 이듬 해 풀려났다. 그 뒤 향리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6-1)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간찰(경유, 1717)
조선 후기의 문신ㆍ외척. 시호는 충문(忠文). 인현 왕후의 오빠이다. 벼슬은 예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을 거쳐,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문집으로 [지재집(趾齋集)]이 전한다.
6-2)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간찰(계사,1713)
7-1)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1736년)의 간찰(기사, 1689)
조선 후기의 척신으로 민유중의 아들이며, 민진후의 동생이고, 인현왕후의 작은오빠이다. 1691년 과거 급제 후, 인현왕후의 폐출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복귀하여 사복시정,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고 노론(老論)에 참여하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쳐 좌의정을 역임했다.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였으며 경종때와 영조 때 노론의 영수로서 활약하였다. 민영익, 순명효황후(순종황제의 정비)의 6대조이며, 명성황후의 종5대조가 된다.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자는 성유(聖猷)이고 호는 단암(丹巖), 세심(洗心).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7-2)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의 간찰(기해, 1719)
8) 애일당(愛日堂) 민진강(閔鎭綱, 1659~1727)의 간찰(정유,1717)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정(士正),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증조부는 민환(閔桓)이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다. 관직은 가감역(假監役)‧군위현감(君威縣監)‧종묘령(宗廟令)‧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하였다.
9-1) 포옹(抱翁) 정양(鄭瀁, 1600~1668)의 간찰(임인, 1662)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안숙(晏叔), 호는 부익자(孚翼子)·포옹(抱翁). 할아버지는 정철(鄭澈)이고, 아버지는 강릉 부사를 역임한 정종명(鄭宗溟)이다.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 삼척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가 1645년(인조 23) 동몽교관에 제수된 뒤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55년(효종 6) 태백산 도심리(道深里)에 들어가 우거하였다. 이후 송시열의 추천으로 제천 월림에 터를 잡았다. 그 뒤 주부·현감·사헌부 지평·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668년(현종 9)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인의 대표적 학자이던 송시열(宋時烈), 유계(兪棨) 등과 가까이 지냈다.
9-2) 포옹(抱翁) 정양(鄭瀁, 1600~1668)의 간찰
10-1) 태백산인(太白山人) 정보연(鄭普衍, 1637~1660)의 간찰(기해,1659)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만창(晩昌), 호는 태백산인(太白山人). 할아버지는 강릉 부사를 역임한 정종명(鄭宗溟)이고, 아버지는 정양(鄭瀁)이다. 부인은 민광훈(閔光勳)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자질과 품성이 뛰어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나 2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10-2) 태백산인(太白山人) 정보연(鄭普衍, 1637~1660)의 간찰(기해,1659)
11-1)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간찰(기축, 1709)
조선 후기에,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허적(許積)이 권세를 잡고 송준길(宋浚吉)을 배척하는 소를 올렸을 때 조정에서 누구도 감히 명변(明辨)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희조는 김수항(金壽恒)에게 글을 올려 논박하니 김수항도 탄복하였다. 송시열이 귀양을 간 뒤에는 양주의 지동(芝洞)으로 물러가 [대귀설(大歸說)]을 지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이 있은 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다시 천거되어 전설별검(典設別檢)에 임명, 이어서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지내고 진천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94년 갑술옥사 후에 다시 기용되어 인천현감이 되고, 이어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지평을 거쳐 천안군수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그 뒤 장악원정에 승진, 해주목사가 되어서는 석담(石潭)에 있는 이이(李珥)의 유적을 찾아 요금정(搖琴亭)을 세웠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유배당할 때 영암으로 유배되었고, 철산으로 이배 도중 죽었다. 1725년(영조 1)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인천의 학산서원(鶴山書院)과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봉향되었다.
11-2)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간찰(계미, 1703)
11-3)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간찰
11-4)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간찰
12) 갑봉(甲峯) 김우항(金宇杭, 1649~1723)의 간찰(기유, 1669)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제중(濟仲), 호는 갑봉(甲峯),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숙종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신임사화로 폐출된 노론 4대신의 누명을 항소하고, 김일경(金一鏡)의 사친추존론(私親追尊論)을 적극 반대하다가 화를 입었다. 김해 김씨(金海金氏) 출신으로서는 조선시대 최후의 정승이다.
13-1) 한주(韓州) 이집(李潗, 1670~1727)의 간찰(병술, 1706)
조선후기 승정원승지,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한주(韓州).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이정룡(李廷龍)이며, 어머니는 제주양씨(濟州梁氏)로 응교를 지낸 양만용(梁曼容)의 딸이다. 형인 이욱(李澳)·이택(李澤)·이협(李浹) 등과 아버지에게 배웠다.
1699년(숙종 2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03년 음공(蔭功)으로 목릉침랑(穆陵寢郎)에 제수되었다.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당쟁의 와중에서 청주목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한 뒤 이듬 해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다.
13-2) 한주(韓州) 이집(李潗, 1670~1727)의 간찰(을해, 1695)
14) 귀락당(歸樂堂) 이만성(李晩成, 1659~1722)의 간찰(갑신, 1704)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사추(士秋), 호는 귀락당(歸樂堂)·행호거사(杏湖居士). 이길(李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유겸(李有謙)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숙(李䎘)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오백령(吳百齡)의 딸이다. 중부(仲父)인 지평(持平) 이흡(李翖)에게 입양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96년(숙종 22) 진사로 정시 문과에 장원해 전적(典籍)·좌랑을 거쳤다. 지평 겸 지제교로 있을 때,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대제학 오도일(吳道一)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면서 오도일의 아들 오수원(吳遂元)을 합격시킨 데 대해 반박하는 소를 올려, 마침내 오수원을 파방(罷榜: 과거 급제를 무효로 함)시켰다.
이어 교리·응교·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706년 대사헌 겸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를 지냈다. 1709년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어,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저술한 『예기유편(禮記類編)』에 주자(朱子)의 글귀를 고친 것을 논죄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삭직되었다. 1716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경종이 즉위하면서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전형(銓衡)을 엄정히 하고 행신(倖臣)의 폐를 막아 침체한 정사를 진흥시켰다.
노론으로서 1721년(경종 1)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노론 대신들과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세제(世弟) 책봉을 주청해 실현시켰다. 그러나 소론이 일으킨 신임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도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불려와서 국문을 받다가 64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15) 소재(踈齋)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간찰(병신, 1716)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 문신·정치인·학자로 노론 4대신의 한사람이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서5남인 밀성군(密城君)의 후손으로 광원군 이구수의 5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의 손자였다. 숙종 말년에 숙종과 종종 독대하였는데, 숙종이 교묘하게 사관(史官)들을 따돌렸으므로 왕조실록에 그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다. 이 점이 문제가 되어 뒷날 임인옥사 때 사형의 빌미가 된다.
숙종·경종대에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한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서양 학술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비록 직접 서구문물을 들여오지는 못하였으나, 노론 실학파의 형성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숙종과 후계문제를 놓고 독대를 하였다는 이유로 1722년 소론에 의해 왕이 되려 하였다 하는 탄핵을 받고 유배, 사사되었다.
숙종 때 사형당한 이사명(李師命)의 친동생이자, 임인옥사 때 함께 사형당한 이기지의 아버지이고, 이건명의 일족이며, 부인은 광산김씨로 김만중의 딸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다가, 노소분당 이후 노론이 되었다. 자는 지인(智仁) 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疏齋), 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 이유민(1658~1729)의 간찰(정원은 정묘, 1687)
조선 후기에, 형조참의, 한성부좌윤,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소론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후에 공조판서가 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영조(英祖)의 신임을 받았다.
17)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간찰(정묘, 1687)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1629~1689). 자(字)는 구지(久之). 호(號)는 문곡(文谷). 효종(孝宗) 2년(1651)에 알성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급제(及第)를 하고, 서인(西人)으로 대제학(大提學)ㆍ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숙종(肅宗) 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재집권(再執權)하자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어 사사(賜死)되었다.
18) 귀애(龜厓) 이완(李琓, 1650~1732)의 간찰(계미, 170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언(粹彦), 호는 귀애(龜厓)이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인 허직(虛直) 이선(李瑄)에게 글을 배웠다. 이선은 당시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는데, 동생인 이완을 가르침에 있어 몹시 친애하면서도 한편으로 가르침의 법도를 잃지 않았다.
문학에도 일찍부터 조예가 있어 15,6세에 시문으로 과거장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시험 운은 없어 향시와 한성시에는 연달아 합격했지만,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내외종(內外從) 간인 모산(茅山) 이동완(李棟完)과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손자인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과 어울리며 서로 도의의 배양에 힘썼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천성(川城)의 4대가로 불렸다.
19) 지평(持平) 이정주(李挺周, 1673~1732)의 간찰(정유, 1717)
조선 후기에, 헌납, 승지, 의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석보(碩輔). 이전(李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원(李志遠)이고, 아버지는 이세위(李世瑋)이다. 어머니는 이현린(李見獜)의 딸이다. 이세기(李世琦)에게 입양되었다.
진사를 거쳐 1708년(숙종 34)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곧바로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713년에는 역시 집의로서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죽은 이원정(李元禎)·유혁연(柳赫然) 등의 복관에 동조했던 집의 이윤문(李允文)을 체직시켰다. 1716년까는 지평에 재임하였다. 1717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서 윤양래(尹陽來)·필선(弼善) 이정주(李挺周)·겸필선(兼弼善) 어유귀(魚有龜)·문학(文學) 황선(黃璿)·겸문학(兼文學) 윤봉조(尹鳳朝)·겸사서(兼司書) 홍계적(洪啓迪)·설서(說書) 어유룡(魚有龍)·겸설서(兼說書) 유척기(兪拓基) 등과 연명하여 왕세자의 수가(隨駕)를 청하였다. 1727년까지 승지에 재직했으나, 같은 해 왕에게 급하게 뵙기를 청하고 정청(庭廳)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 판부사(判府事) 이관명(李觀命), 우의정 이의현(李宜顯) 등 100여 인과 동시에 파면되었다.
20) 강린(姜潾)의 간찰(병신년, 1536)
조선 중종(中宗) 때의 유학. 본관은 진주(晉州). 부사맹(副司猛) 강이행(姜利行)의 아들로, 1513년(중종 8)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함. 글씨에 능하여 중종의 총애를 받았던 강징(姜澂)의 동생이다. 강린(姜潾)의 간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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