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개교한 ‘공립진주실업학교’는 1911년 ‘진주공립농업학교(이하 진주농고)’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이는 現 경상국립대학교의 기원이 되었다. 진주농고는 학생 항일운동의 중심지로서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내며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했다. 진주지역 항일운동사에서도 진주농고 출신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설창수와 장두관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후배들에게 커다란 자부심이자 진주의 자랑이 되었다.
6.25전쟁 당시에도 진주농고 출신들은 도내에서 가장 많은 학도병이 자원하는 등, 조국이 위태로울 때마다 앞장서며 뜨거운 애국정신을 발휘했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장태현(張兌鉉)·장람(張嵐) 형제는 인동장씨(仁東張氏)로, 경남 사천읍 금곡리 출신이며 진주농고를 졸업했다. 형 장태현은 설창수와 동기였으며, 형제의 문학 습작 노트와 시집 친필 초고 등이 남아 있다. 특히, 해방 전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상적 열망을 담은 친필 원고들은 수려한 필체와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준다.
본 자료에서는 형 장태현보다 아우 장람(호: 波林)의 자료가 더욱 풍부하다. 장태현은 해방 전 밀양군 세무서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으며, 이때 사용된 세무서와 재판소 용지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자료로는 해방 후 진주지역에서 발기된 ‘문화건설대’의 창설 준비 과정과 기관지 ‘문건시보’ 발행을 위한 준비 초고가 있다. 친필 초고에 등장하는 인물과 작품에서는 이상에 대한 열망이 문학적으로 표출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진주지부 문화건설대의 발족 과정과 발기 의의가 담긴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진주지역에서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한 단체로서의 가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본 출품물들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을 거쳐 1970년대까지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수집되었다. 해방정국은 한국이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자주국가를 건설하는 중요한 시기였으나,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정치적 혼란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장람의 일부 친필 자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요 출품물은 다음과 같다.
⑴ 장람(張嵐) 친필 자료
일제강점기 일본명 張山峻(하리야마 타카시, Hariyama Takashi).
1) 습작 및 필사 친필노트
① 1938년 이후 한용운·정지용 등 시문학 필사 노트 [창작집 무유봉 創作集無孺峰], 23.5x19.5cm, 50매
⓶ 일문·영문 친필원고 [涙の悲憤], 1943, 21x29.8cm, 50매
③ 일문친필 노트 [제1시집 산책 散策], 25.8x18cm, 15매
④ 일문친필 노트 산문시 [악마의 생활 悪魔の生活], 1944.5.9./5.12, 25.8x18cm, 12매
⑤ 일문친필 1944년작 필사 [詩集], 21x30cm, 18매
⑥ 일문친필 1944년작 편성원고 [さすらひ], 21x30cm, 24매
⑦ 철학 관련 내용이 일문·국한문으로 필사된 [독서여록 讀書餘錄], 을유년(1945), 19.5x13.3cm, 40매-철학 관련 내용이 필사
⑧ 한글필사 [잡기 雜記], 1950년대, 19.5x13.5cm, 10매
박봉우(朴鳳宇, 1934~1990)의 “창은 열리지 않어요” 등 10여 명의 文語 필사.
2) 창작 원고
① 한글친필 산문 [두상록 陡想錄] 1946.4.13.~10.14, 27.2x19.5cm, 하드보드 표지, 조선총독부재판소 용지에 펜글씨로 기재 34매.
⓶ 한글친필 산문 [장파림(張波林)명 노트], 정해년(1947), 26x17.5cm, 89매
③ 한글친필 산문 [회상록 回想錄], 정해년(1947), 25x17.3cm, 재판소 용지 사용 73매
④ 한글친필 기행문 [ -한글 반포 551년 기념 제1회 금산 등반 여정- 南海의 小金剛], 1947, 19.5x13.3cm, 38매
⑤ 한글친필 산문시 [파림시집 매장 波林詩集 埋藏], 1947~48, 25x17.5cm, 재판소 용지 89매
⑥ 한글친필 산문시 [파림시집 난발 波林詩集 亂髮], 25.2x18.2cm, 재판소 용지 사용 184쪽
쓴 시기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시집 매장]과 일부 겹쳐지는 시문이 있어 이와 비슷한 시기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⑦ 시편 친필 [수족관을 헤어가는 나는 한 마리 담수어], 연대미상, 20x13.5cm, 21매
목차에는 담수어(淡水魚) 16편, 바다의 戀書 10편, 回想의 冊曆 4편이 적혀있다.
⑧ 친필원고 [詩集 마음의 怒濤를 헤치다] 2점 일괄 - 1951, 20x14.2cm 외
- ‘晉州 慶日印刷局版 1951’로 기재된 초안 묶음 24매.
영남문학회용지 원고 사용 2매
⑨ 친필 산문 [백로집 白露集] - 1947~1950/25.5x18.5cm, 47매
1940년대 해방이후 좌우익 대립 시기에 있어서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갈등을 당시 철학사상을 결부하여 일기 형식으로 서술했다. 일기는 1947.8.18.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0.7.12.까지로 1947년 5건, 1948년 6건, 1950년 6건이 확인된다.
⑩ 春山光의 제1시집 및 초고원고
시인명을 春山光(하루야마 히카리)이라는 이름으로 기재했으나, 글씨체를 보았을 때 장람의 글씨로 보여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 [시집 온상 詩集溫床] 甲申年(1944), 25.5x18cm,38쪽
○ ‘溫床’, ‘赤薔微’, ‘白菜と大根’ 친필원고 3매
○ 시집온상의 초고원고 [詩集溫室] 癸未年(1943), 21x15cm, 19매
○ 시집온상의 초고원고 [詩集溫床] 甲申年(1944), 21x15cm, 22매
⑪ 친필원고 [人生이라는 드라마] 외 20여 종
1940년대 해방 이후
19.2x26.5cm 외
‘목노집이라는 이름의 정거장’, ‘첫 목련이 피는 날’, ‘춘설’, ‘죽엄으로 가는 길’, ‘싸인북’, ‘남포동’, ‘인생이라는 경마장’, ‘그리운 사랑’ 등 시 원고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나아갈 길을 주장하는 글 원고, 메모 등이 있다.
⑫ 친필원고 [건국일주성상을 회고함 建國一週星霜을 回顧함] 외 총14종 61매
1949.7~8
19.2x26.5cm 외, 총61매
대한민국정부수립 선포 1주년을 맞아 회고와 함께 3·1운동, 8·15 광복, 언론자유, 선거제도, 통일, 토지개혁 등 근간의 역사적인 사건을 토대로 나아갈 길과 주장을 서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세무서 용지 이면에 친필로 기술하였다.
⑵ 장태현(張兌炫) 친필 자료
일제강점기 일본명 張山晃. 일제강점기 밀양군 세무서에서 근무를 했고, 해방 후에는 사천읍 농업협동조합장으로 근무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경남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 농업학(農業學) 관련 일문 필기 노트, 20x15.8cm, 36매
○ 鮮語漢文 노트에 한글친필 [제2학년 2조 오농 吾農], 20x15.8cm, 36매
‘1945.1.6. 샬사스의 호수에서 떠나든 첫날밤’ 기록문 외 다수 기록
⑶ 독립선언기념호 [영남문학 嶺南文學] 제6집
영남문학회, 1948
23.7x16.9cm, 102쪽
34쪽 장람 ‘청춘浪漫派’ 수록
⑷ 장태현 시가 실린 [예총진주 제3집 藝總晉州第三輯]
예총진주시지부, 1967
21.2x15.5cm, 111쪽
1965년부터 연간으로 발행된 [예총진주]는 개천예술제(開天藝術祭)의 기록과 문인들의 발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본 자료 26쪽에는 장태현의 ‘日月’이 수록되어 있다. 장태현은 1940년대 초반 조연현 등과 어울려 ‘시림 동인’에 가담했고, 60년대 후반 경남일보 최재호 사장 시절 문화부 기자로 근무한 일이 있다.
⑸ 장기식(張騏植) 초보(抄譜) 필사본 [인동장씨세계금곡파] 외 총2점
○ [인동장씨세계금곡파 仁同張氏世系琴谷派], 庚寅正月二十五日, 19x13cm, 51매
○ 張永水 琴谷理 [가정용 보감 家庭用寶鑑] 필사노트, 20x15.5cm, 24매
⑹ 일제강점기~해방 후 60여 점 문학 친필원고 모음 외 총 8종
25.8x18cm 외
○ 장태현·장람의 친필 일문 및 한글로 쓴 창작문학 외 다수 60여 점.
○ 晋高校歌 박두진 작사, 박종화 감수, 나운영 작곡 / 晋農校歌 설창수 작사, 이승학 작곡 필사
○ 장람의 [詩集 淡水魚, 진주 경남일보사 1953] 친필원고 11매
○ 은박지 이면에 지용과 영랑 시 필사 2매
○ [문학가동맹 진주지부 장파림(張波林) 명함]
조선문학가동맹 진주지부는 1946년 2월 김병호(金炳昊, 1904~1959)가 지부장이 되었다.
○ 교류 엽서 일괄
사천고등학교 장람 앞 1955.9.26. 1점
장일영(張逸影) 앞 엽서 3점
장태현 앞 엽서 11점
○ 서신 2점 일괄
- 밀양군 세무서 張山晃 앞으로 張山峻이 보낸 서신(봉피포함), 1936.4.11. 우편 직인, 아버지 말씀을 받아 2.27 적어 보냄.
- 사천읍 금곡리 농업협동조합장 장태현 앞으로 받은 봉피. 1961.11.21. 우편 직인
○ 효해(曉海)의 수필 [찾아진 무궁화] 친필원고, 을유(1945).11.1, 7매.
⑺ 진주 문화건설대 발행 문건시보(文建時報) 창간호 초고 23종
1945.10
26.5x18.5cm 외
[문건시보 편집도안①] 2매
[문건시보 편집도안⓶] 2매
[새 朝鮮의 文化建設을 依한 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 1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는 1945년 8월 18일 임화·이태준·김남천·이원조 등이 주도한 진보적 문화운동단체이다. 본 자료에서는 이 단체 발족의 의의와 함께 의장 임화, 서기장 김남천으로 서술되어 있다.
[간단한 연필 메모] 1매
[文建部署와 陣容] 1매
[작품모집] 1매
[목차메모] 1매, 꽃그림 인쇄지 뒷면 메모
[문화건설대 선언] 2매
[연혁] 3매
[속히 우리나라를 찾자!] 3매
장혁의 [연혁 沿革] 4매, [계절풍 季節風] 2매
김건웅(金建雄)의 [새 조선의 예능문화와 예술인의 사명] 5매
장일영(張逸影)의 [晉陽사람들] 1매
김창국(金昌國)의 [誤綴極히容恕 -우리교육에 관한 소심-] 3매
[夢陽先生이여!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시라] 3매
[演壇에 선 동무] 1매
[기빨아래 몰였구나] 1매
[용부림치는 隊列] 1매
[붉은 마음] 2매
[대열 隊列] 2매
[이별 離別] 1매
[별] 1매
문화건설대는 1945년 광복을 맞아 설창수, 박세재, 박생광 등이 발기하여 조직되었고, 민중의 계몽과 진주지역의 향토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1948년에 해체되었으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진주지부의 모태가 되었다.
초고 ‘문건시보’가 실제로 발행 되었는지는 확인 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 자료 친필원고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문화건설대’ 창설의 의의와 연혁, 창립 관계 명단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⑻ 1970년대 신문 90여 점 스크랩북 - 35x25.5cm, 19매
70년대의 문학관련 기사가 대부분으로 이 중에 장람의 시 ‘友石에게’, ‘南江’ 등 2편이 있고, 장태현의 시 ‘단풍연가’, ‘고향춘삼월’, ‘진양(晉陽)의 추억’, ‘산성’ 등 4편이 있다.
당시 육영수 여사와 김종필 총리, 그리고 일본총리 다나카 카쿠에(田中角榮) 관련 기사도 일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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