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각본 : 최인규
출연 : 최지애, 박일룡, 권일청, 전택이
제작자 : 싸이아(미국)
촬영 : 최인규 / 조명 : 함완섭 / 조감독 : 정창화 外
영문제명은 ‘The People Vote’이다.
※ 崔寅奎(1911~1950)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1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으며,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普)를 중퇴하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운전 조수 생활을 했다고 한다(친일인명사전). 1935년에 형인 최완규(崔完奎)와 함께 자본금 5만원으로 신의주 본정에 고려영화주식회사(高麗映畵株式會社)를 설립했으며 대표직을 맡았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37년 경성으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1938년부터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 조영)에서 녹음부서를 담당했다(조광). 1939년 천일영화사(天一映畵社)의 제작으로, 자신이 각본을 쓴 [국경](1939)의 연출을 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동아일보). 이후 1939년 경성일보(京城日報) 주최의 작문대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소학교 학생 우수영(禹壽榮)의 수기를 원작으로 한 [수업료](1940)의 감독을 맡았으며, 여세를 몰아 방수원(方洙源)이 운영하던 향린원(香隣園)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집없는 천사](1941)도 연출했다(매일신보, 삼천리). 두 작품은 모두 이창용(李創用)의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에서 제작되었다. 이후 1942년 조영, 고려영화협회 등을 포함하여 조선의 제작회사들을 통폐합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朝鮮映畵製作株式會社)가 발족하자 연출과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군국주의적 내용을 담은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과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의 감독을 맡았다(친일인명사전). 해방 후 최인규는 최완규와 함께 고려영화주식회사를 재정비했으며, 1946년 [자유만세]를 시작으로 [죄없는 죄인], [독립전야](1948), [파시](1949) 등 일제의 탄압과 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을 담은 일련의 영화들을 감독했다. 또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의 의뢰를 받아 문화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단독정부 수립 총선거를 교육하기 위한 [인민투표](1948), 한국의 예술과 풍물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한 [장추화 무용], [희망의 마을](1948) 등이 그것이다(경향신문).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공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친일인명사전). 영화배우 김신재(金信哉)의 남편이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48년 8월 8일자 2면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 5면
매일신보 1939년 7월 1일자 3면
淸秋의 映畵, 『삼천리』 제12권 제9호(1940년 10월 발행)
生長發展하는 朝鮮演藝界, 『조광』제4권 제7호(1938년 7월 발행)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3』, 민족문제연구소, 2009, 757-760쪽.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7년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작성: 김한상]
미국에서 공급받은 용지에 인쇄하여 상태도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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