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관광단’의 오사카 방문 단체사진
사진 21.5x27.5cm 케이스 36.5x44cm
‘韓國觀光團と大阪觀迎會
明治四十二年(1909)四月十八日撮影
日本大阪 泉緣水軒‘
출품물은 1909년 4월 18일에 오사카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사진에 위의 글이 인쇄되어 있다.
통감부의 계획 하에 경성일보사가 주관하고 이완용이 개입한 1909년 제1회 일본관광단은 단장 민영소를 비롯하여 대부분 전현직 관리와 실업계 인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국인 94명, 경성일보사 사원과 통역 등 임원 16명을 합해 총 110명의 대규모 단체였으며, 4월 11일 경부선으로 장도에 올라 일본을 시찰하고 5월 10일에 입성하였다.
통감부는 일본의 제철소·군수공장·방적공장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문명과 고도인 교토·나라 등의 일본 역사문화를 보여줌으로써 한국병합이 구체적 일정에 오르는 시기에 회유책의 일환이었다.
정부에서 여비를 지급하여(09.03.19) 백원씩을 보조하고(09.03.23) 물품을 기증한다던가(09.04.04), 통감 이토가 50명을 보내기로 했는데 총리대신 이완용이 110명을 뽑았다고 하는 설(09.03.24) 등이 있었다.
단장 민영소를 비롯하여 김종한, 이용직, 이헌경, 이중하, 윤웅렬, 정만조, 예종석, 윤덕영 등이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제2회 일본관광단이 공진회 시찰 등의 명목으로 4월 20일에 출발하여 5월 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 단장 민영소(閔泳韶, 1852~1917) 정1품
사진 1열 중앙에 자리한 인물로 추정된다.
구한말의 관료이자 정치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순약(舜若)이다.
민씨 일족에 속해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타는 일이 있었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를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 때까지 요직을 거쳤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 김종한(金宗漢, 1844~ 932) 종1품
사진 1열 우측에서 5번째 의자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다.
구한말의 고위관료이며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 이용직(李容稙, 1852~1932) 종1품
사진 1열 우측에서 4번째 의자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다.
문장가로 유명하던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호는 강암(剛庵), 본관은 한산이며 을사조약 때 순절한 조병세의 사위이다.
* 이중하(李重夏, 1846~1917) 정2품
사진 1열 우측에서 8번째 의자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다.
대한제국기 궁내부특진관, 규장각제학 등을 역임한 관료.
1909년 일진회가 대한제국과 일본의 '정합방론(政合邦論)'을 주장하자 민영소(閔泳韶)·김종한(金宗漢) 등과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을 조직하여 그 해 12월 5일 원각사에서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그 주장이 부당함을 공격하였다. 또, 1910년 규장각제학으로 한일합방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지방관리 재직시 청렴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 윤웅렬(尹雄烈, 1840~1911) 종1품
무과에 급제한 후 제2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882년부터 교련병대 창군을 지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정변 실패를 예상하여 관직을 사양했다. 갑오개혁 이후 경무사와 군부대신 등을 지냈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법부대신, 고등재판소 판사 군부대신 등을 거쳐 을사 늑약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도되자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가 되으며, 초대, 4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조선귀족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1911년에 사망하였다. 윤두수의 차남 윤흔의 7대손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찬정에 증직된 윤취동(尹取東)의 아들이며, 경재 윤영렬의 형이다.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은 그의 종손이었다. 한일 합방 직후 사망했다. 자는 영중(英仲)이고 호는 반계(磻溪), 본관은 해평이다. 충청남도 출신.
* 이헌경(李軒卿, 1851~1924년 이후) 정2품
대한제국기 궁내부특진관, 함경남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관료.
1874(고종 11)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세화(李世華)의 사손(祀孫)으로 사악(賜樂)을 받았다.
수찬·직각을 거쳐 1890년 대사성을 지내고, 상의원사장·중추원의관·궁내부특진관·경효전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함경남도관찰사가 되었다. 1909년 신사(紳士) 100명의 일본관광단의 일행이 되어 공업시설과 명승지를 시찰하였다.
* 정만조(鄭萬朝, 1858~1936) 정3품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협조한 대표적인 유교 계열 인물이다. 호는 무정(茂亭)이다.
* 윤덕영(尹德榮, 1873~1940) 정3품
경술국적 8인 중 한명으로 일제강점기에 조선귀족 자작위를 수여받았다. 본관은 해평. 부친은 증영돈녕부사 윤철구, 조부는 의정부의정대신 윤용선이다.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의 백부이다. 즉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형이다. 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10대손이다. 호는 벽수(碧樹)이다.
* 예종석(芮宗錫, 일본식 이름: 草內宗錫소나이 소샤쿠, 1872~1955) 종2품
대정실업친목회 회장을 지낸 일제강점기의 실업인으로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의흥이며 원적지는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이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바닥을 칠 때인 1909년 4월 11일, 90여 명의 한국인들이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일본 여행에 나섰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한국통감부 기관지를 모체로 하는 경성일보사가 모집한 ‘제1회 일본관광단’이었다.
1910년 4월의 제2회 일본관광단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친일파 박기순이 히로시마 해군공장을 보고 나서 “혼백이 자빠지고 신(神)이 놀랄 만하다”며 감탄한 일을 소개한다. “이 관광단을 전후해서 관광단의 이름이 붙은 일본 관광은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고 논문은 말한다.
‘한저’에 편승해 일본이 부추긴 관광 붐은 대한제국 멸망 2개월 뒤인 1910년 10월에는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의 출발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대한제국이 없어지자마자 단체로 일본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오마이뉴스)
(2) 3층 정자관을 쓴 조선 사대부 사진
사진 26.5x20.5cm 케이스 38.5x32cm
정자관은 지위가 높을수록 층이 많은 것을 썼으므로, 사진 속의 인물은 구한말의 고위층 인사로 추정된다.
위의 한국관광단 사진과 함께 한 집안에서 소장하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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