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에 저술된 일기는 총 다섯 종류가 현존하고 있다. 인조 대의 문신인 석지형(石之珩), 정지호(鄭之虎), 박황(朴潢), 나만갑(羅萬甲), 남급(南礏) 등의 저술이다. [병자일기 丙子日記], [병자난리일기 丙子亂離日記], [남한일기 南漢日記] 등으로 불린다.
현감 남급(南礏)이 쓴 [병자난리일기]는 저자 생존 시에 일기의 내용 일부분이 빠진 채로 이루어진 것과 저자 사후에 빠진 일기를 보충하여 쓴 일기들이 남아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 현감 남급(南礏, 1592~1671)이 병자호란 때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실기가 있는데, 출품된 [병자난리일기]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다른 이본 필사본으로서, 국립중앙도서관 병자일기와 비교 시에 필사본 권말 부분 두 곳에서 7장이 추가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44쪽에 “색도(色都) 경유후(慶兪後)는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오면서 탄환을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박충겸 종의 아들 복수를 갚은 것이라고 한다”까지 내용이 동일하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이본 필사본은 2장 반이 추가로 삽입이 되어 있다. “사인 이광면(李光勉)은 난을 피하여 강도로 들어왔는데 의병을 따라 들어온 것이다”로 문구로 시작되면서 ....(2장 반 추가) “...대저 청나라는 몽고와 다른 사나움이 있다”로 끝을 맺은 후 “영부사 김상용(金尙容) 정월 22일에 남문 위에서 청병이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하는 내용 이후는 동일하다.
또한 영양남씨종중에서 1809년 목판으로 간행된 [신안세고 新安世稿] 권3-4에 남급이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모시며 보고들은 바를 기록한 병자일기(丙子日記)가 있는데, ‘숭정병자후 43년 무오년(1678)’ 모춘 후학 선성 이유장(李惟樟)이 남급(南礏)의 이 일기를 보고 지은 글이 있다. 이를 [신안세고]과 비교 시에 2장 반 이상이 추가되어 있다. 내용은 “청나라 황제가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에게 장군에게 힐책하며 가로대 교린을 할 때는 성신을 다해야 되고 조선이 3백년을 존속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그 뜻을 버리고 져버린다면 오늘이 바로 청국이 되는 것이다”는 내용의 2장 반 분량의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병자난리일기]는 저자가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한 체험을 서술한 것이기에 호종기간의 일기가 내용의 중심을 이룬다. 즉, 일기는 ‘12월 11일부터 이듬해 4월 4일’까지 쓰였지만, 남한산성에서 겪은 사건서술이 중심을 이루고 남한산성을 나온 이후의 일기는 양적인 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기의 중심은 ‘12월 11일부터 익년 1월 30일’까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기는 호종기록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중심인물은 주로 국왕으로 되어 있다. 일기의 주체는 저자 자신이므로 당연히 자신의 체험담이 중심이 될듯하나, 이 일기에서는 국왕을 중심인물로 놓고 조정에서 벌어지는 사건 전개에 초점을 두고 있다. 사건서술도 대립하는 두 세력인 척화파와 주화파의 갈등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일기 곳곳에서 전란의 참혹상과 정치현실의 잘못된 점 등을 서술하고 있다. 전란으로 인한 무질서와 가족 간의 이산, 아비규환과 같은 혼란 등 전란의 참혹상을 사실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폐해를 고발하고 있는데, 이때 작자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현존하는 필사본에는 없는 내용이 추가 기록된 것 등으로 미루어 사료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판단된다.
○ 남급(南礏, 1592~1671)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탁부(卓夫), 호는 유유헌(由由軒)이다. 남급은 선조25년(1592)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범상한 아이들과는 달라 가문을 일으킬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 사옹원 봉사로서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당시 성 안에서 종이조각을 얻어 산성에서 있었던 일의 수말을 다 기록하였고, 인조15년(1637) 4월 4일 숭덕(崇德)이라는 연호를 쓰자 절필하였다. 이 때 쓴 일기가 [난리일기 亂離日記]이다. 환도한 뒤 종묘시(宗廟寺) 직장(直長)을 제수 받았고, 이에 묘우(廟宇)를 수리하고 위패를 고쳐 봉안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해 봄 조정에서는 왕을 호종한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과거를 실시하였으나 홀로 치르지 않았고, 또 얼마 안 있어 별제(別提)를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이로부터 고향에 내려가 [잠농요어 蠶農要語]를 지었으며 인조27년(1649)에는 사림이 김학봉(金鶴峯) 문집을 간행할 때 교정하여 바로잡는 일 등을 했다. 효종3년(1652)에는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제수 받았고, 현종 12년(1671)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0세이다. 뒤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유유헌유고 由由軒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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