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경종 [의릉지문 초도서 懿陵誌文草圖書] 원문 > 제3회 고완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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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경종 [의릉지문 초도서 懿陵誌文草圖書] 원문 > 제3회 고완관지

[123] 경종 [의릉지문 초도서 懿陵誌文草圖書] 원문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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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1724
사이즈 133.5x1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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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지문(懿陵誌文)은 영조 즉위초년 갑진(甲辰, 1724)에 작성되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내 장서각에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의릉지문 전문은 [열성지장통기 列聖誌狀通紀] 권21 ‘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조에 수록되어 있으며, 좌의정 유봉휘(柳鳳輝)가 짓고, 행 부사과 윤순(尹淳)이 썼다


출품물은 ‘의릉지문초도서’의 전반부로, 얼룩과 접힌 부분에 손상이 있다.

뒷면 상단에 ‘懿陵甲辰表石先公筆 此誌柳鳳輝撰尹淳書而先公爲草圖書書寫官書之’의 묵서가 있으나, 출품물을 쓴 초도서 서사관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於戲! 洪惟我景宗 德文 翼武 純仁 宣孝大王, 姓李氏, 諱 【昀】 字, 【輝瑞】 肅宗大王之長子, 顯宗大王之孫也。 始肅宗, 久無嗣爲憂, 嬪張氏, 以戊辰十月二十八日誕王, 肅宗喜甚, 召諸大臣謂曰: "國本未定, 人心靡係, 今日大計, 不在他也。" 遂定號元子, 三歲, 封王世子。 四歲始學《千字文》, 肅宗親製序以授之曰: "儲宮方講習是書, 性旣聰朗, 心智日長, 加意學問, 正在匪遠。" 仁顯王后子之, 如漢 明德后故事, 慈孝俱甚篤。 八歲行入學禮, 周旋中節, 講音洪亮, 圜橋人士, 莫不相慶。 是歲行冠禮, 謁太廟, 隨大駕, 拜永禧殿晬容, 謁永昭殿。 仍命師傅、賓客與春坊僚屬, 日入胄筵, 遍講《孝經》、《小學》、《三綱行實》等書, 講官、師傅, 請見心畫, 大書孝悌忠信、禮義廉恥、敬以直內, 義以方外等字, 與之, 臣僚傳玩。 自是, 學問日益進, 臨筵問難, 出人意表。 嘗問伊尹放太甲於桐, 終不改過則如之何, 又問序曰: "無忝人之名, 名字何義?" 又問: "史丹伏靑蒲, 基王氏之禍, 疏廣、疏受, 見幾而作。 由是論之, 史丹不如廣、受乎?" 若此者多, 雖自謂老師宿儒, 皆歎其天縱不可及。 講官嘗問: "《孟子》七篇, 於何尤着力乎?" 答曰: "自《梁惠王》至《盡心》, 無非闡明義理, 夫豈拈出某處, 尤爲着力乎?" 又問自期如何? 答曰: "非曰能之, 乃所願, 則舜何人也, 予何人也。" 辛巳, 仁顯王后昇遐, 殯肂攀擗, 哀動傍人, 至發靷時, 奉辭路次, 久立哀慟, 返虞日, 出郊陪還, 哭不絶聲, 道路觀者皆悅。 歲乙酉, 卽肅廟卽位之三十一年也。 王三上疏, 請稱慶, 有曰: "於前史有可據之文, 在今日爲必行之禮。" 肅宗答曰: "疏辭雖出人子之至情, 顧予何心, 作此豫大之事乎?" 時肅宗以好學勤政, 積勞成疾, 思就閑調養。 是年十月, 有禪位之命, 王驚遑罔措, 連章固辭, 召宮僚諭之曰: "達夜泣請, 終不得回天, 伏閤陳懇之外, 更無他道。" 將出閤門, 時, 天寒大雪, 令去帷幕, 肅宗曰: "爾之情事, 不可不念。" 遂勉從焉。 後十二年丁酉, 肅宗以五載沈綿, 酬應漸難, 依國朝故事, 令王聽政代理, 王又懇辭, 不獲命, 且以替勞之義, 黽勉承命。 群臣入朝稱賀, 特令停皷吹, 裁決庶務, 咸當於理。 然皆一一上稟而後行, 如史官傳批, 亦詢政院, 示不敢專也。 首春下諭八路, 勸農桑, 百姓餓者, 賑貸之, 疾疫死者, 收瘞之, 每於諸路監司之辭去, 輒召見勑勵, 俾嚴黜陟, 寒暑遣近侍, 審獄放輕囚。 宮墻頹圮, 有潛入者, 以無情而原之, 刑曹據邀截公文律, 論裂破書啓人罪至死, 特以一罪不可用, 比律減死焉。 遇臣僚以禮待, 宗親以恩, 大臣歿, 則必設次而哭, 宗臣之喪, 亦官庀喪葬, 竝令仍給祿, 以終三年。 王弟延齡君 昍蚤卒, 王自製文以祭, 有曰: "呼之不應, 漠漠無聲, 已矣於世, 空想形儀。 居諸如流, 卽山有期。 衿陽一夕, 月色千秋。" 實情到之辭也。 肅宗違豫積十數年, 王侍湯憂灼, 始終如一。 嘗移御慶德宮, 王隨往, 禮當祗迎坤殿, 語宮官曰: "聖候未寧, 異於他時, 我當先入面候。" 卽入闕問候, 還出秪迎, 倉卒周旋, 允合情禮, 左右相顧欽頌。 及行幸溫泉, 留王監國, 王祗送于江頭, 羽旄旣遠, 猶竚立瞻望, 焦憂形於外, 都人觀者, 皆嗟歎。 庚子肅宗疾大漸, 王涕泣皇皇, 命禱廟社、山川。 逮奉諱, 禮官進嗣位節目, 答曰: "天崩罔極之中, 乃見此, 人子情理, 豈忍是哉?" 百僚連日齊籲, 始以上承慈敎, 勉許焉。 王旣受寶踐阼, 凡政令施措, 一視代理時, 而尤以開言路恤民隱, 爲先務。 至辛丑, 王以未有嗣續, 國勢孤危, 冊封我殿下爲王世弟, 所以重宗廟社稷也。 世弟五上章固辭, 王賜答慰諭, 勉之曰: "小心翼翼, 勤勤孜孜, 以副國人之望。" 時, 王上奉惠順大(妣)〔妃〕, 思盡養志之孝, 景福堂在萬壽殿舊基, 王預爲之修營, 不煩有司, 易其扁曰景福殿, 及壬寅去喪, 奉大妃移御。 且欲一設宴上壽, 而母妃不欲, 則不敢强, 徐復乘間言, 屢而後得請, 以至供獻之物, 母妃念民力欲減, 則亦承順行之, 不久又開陳而復舊焉。 嘗推老老之恩, 民有高年(출품물은 여기까지)


者, 必惠養而且賜之爵, 麗祖墓, 儀物有缺, 則命守臣改之, 新羅王廟, 祀饗不虔, 則官其孫奉之, 祭鄭夢周之祠, 錄金宗瑞之後。 一日, 王下敎于政院曰: "一自嗣位以後, 觀朝臣之所爲, 少無輔護國家之事。 言念時事, 不覺痛惋。" 仍命黜三司諸臣, 奪將臣之符, 遞相臣之職, 竝行竄逐。 俄而變書上, 告將相謀不軌, 王命有司, 悉按驗誅討。 嘗久旱, 親禱社壇, 却輦乘小輿, 烈日下曝, 侍臣迭諫, 世弟亦懇請, 終不聽, 徹夜露禱罷還。 仍坐殿錄囚, 猶不雨, 又禱于郊壇, 得雨後已。 翌年旱, 又親禱于社壇、農壇, 疏罪囚避正殿, 減膳撤樂, 至秋乃復。 每謁太廟, 雖雨雪不止, 祧廟在後稍遠, 而必步進。 嘗於孝寧殿練祭改題主時, 北向拱立, 侍臣以時刻稍久, 請俯伏不應, 其敬謹如此。 命立私親廟, 定祝號、祭式。 自王登極後, 更來言追報事者, 多涉越分, 不惟不之採, 輒斥遠之, 及大臣禮官, 裁酌而請之, 乃從焉。 王於爵賞, 務愼惜, 必遵舊例, 罔及私昵。 廟堂薦剡外, 以三司擢承宣者, 終王之世, 亦不過若而人。 王每以黨論爲深憂, 凡章疏之涉於相排軋者, 率以靜鎭爲務, 略不示左右。 嘗因旱求言, 敎曰: "黨痼之禍, 可勝言哉? 甚至於一室之間, 干戈相尋, 噫嘻! 情志之阻隔, 胡至此極? 卿等俱以世祿之臣, 義同休戚, 値此板蕩之秋, 殫竭心力, 夾輔王室, 以慰祖宗陟降之靈, 則乃祖乃先, 必致悅豫, 豈不竝受其福乎?" 廷臣相與言曰: "承此敎, 而爲黨論, 我卽匪人。" 王性沈重寡言笑, 接待臣隣, 顔色溫然, 而望之自然有敬畏之心。 尤嚴於隄防, 近昵有不侫者, 痛誅, 絶不少饒, 宮禁肅如也。 停良家女選充宮人之令, 革貢物人科外責應之弊, 諸路菑荒, 則蠲常稅, 西邑凋弊, 則減田租, 發常平之藏, 俾糶都民, 捐籍罪之産, 以塡畿賦。 凡諸司、各營置差設舖, 射利害民者, 一切罷去。 命卿宰、侍從、諸路使臣, 薦進學行、才局、智略人, 且以法久弊生, 命輔臣商確, 方欲大究軍民煩重之役, 以盡其通變, 而事未及就, 甲辰七月感病, 八月二十五日, 大棄群臣于昌慶宮之別殿, 在位四年, 春秋三十有七。 德壽無徵, 神理謬錯。 嗚呼痛哉! 我殿下攀號莫及, 與小大臣, 議王功德, 謹上諡曰: "德文翼武純仁宣孝。" 廟號曰: "景宗。" 陵曰: "懿陵。" 以是年十二月十六日乙酉, 葬王于楊州治南坐申向寅之原, 卽新卜兆也。 王妃沈氏, 贈領議政靑恩府院君 浩之女, 戊戌, 以嬪薨, 庚子追冊爲妃。 繼妃魚氏, 領敦寧府事咸原府院君 有龜之女。 嗚呼! 王德宇渾厚, 器度沈凝, 在儲位三十一年, 造詣已極高遠, 而含晦章美, 不見于外, 處己應事, 無大小無難易, 渾然無聲跡之可尋, 苟非深有得於涵養之工, 何能及此? 若不役志於外物, 不嬰情於俗事, 崇儉之德, 懋實之政, 在凡主固爲盛, 於我大行, 則尙其細者耳。 嗚呼! 惟我肅宗大王, 蚤夜憂勤, 治定功成, 躋一世於熙皞大猷之域者, 殆五十年, 此正平陂崇圮之會, 而王以卓異之資, 受精一之傳, 善承謨烈, 克紹志事, 不言而敎成, 不動而化行, 如風之偃草, 若雨之潤物, 庶幾乎媲周成、康, 軼漢 文、景, 而不弔于天, 盛業未究, 此一邦臣民所以抱窮天之哀, 而懷沒世之思者也。 嗚呼! 王深知我殿下聰明仁孝, 有君人之度, 早定位號, 以係民望, 入則相與問寢視膳, 歡侍長樂, 出則鳳輦在前, 鶴駕在後, 都人士女, 塡咽街巷, 擧欣欣然有喜色而相告。 及至大漸之夕, 自公卿百官, 至輿儓下賤, 莫不奔走悲號, 如喪考妣, 而其所恃而安然者, 秪以元良豫建, 神人有所托而然。 在昔宋臣贊其君仁厚之德, 以爲社稷長遠, 終必賴之。 今宗社有磐泰之安, 寶祚綿億萬之期, 使海隅含生, 皆得以涵濡欣戴於仁化之初者, 寔賴王光前垂後之盛烈洪休。 夫豈仁厚一德, 所可倫擬也哉? 嗚呼其盛矣! 嗚呼其盛矣!


議政府左議政柳鳳輝撰, 行副司果尹淳書



“아! 거룩하신 우리 경종 덕문 익무 순인 선효 대왕(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이름[諱]은 균(昀)이고, 자(字)는 휘서(輝瑞)이니,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장자(長子)이며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손자(孫子)이시다. 처음에 숙종께서 오래도록 후사(後嗣)가 없음을 근심하셨는데,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무진년 10월 28일에 왕을 탄생하니, 숙종이 매우 기뻐하시어 여러 대신을 불러서 이르시기를,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아서 인심이 매인 곳이 없었으니, 오늘의 큰 계책(計策)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시고, 마침내 원자(元子)의 칭호(稱號)로 정하셨고, 세 살 때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셨다. 네 살 때에 처음으로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숙종께서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 주며 이르시기를, ‘저궁(儲宮)이 방금 이 책을 강습(講習)하는데, 성품이 총명하여 심지(心智)가 날로 자라나니 학문에 뜻을 더함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셨고,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아들로 삼으시기를 한(漢)나라 명덕후(明德后)의 옛일과 같아서 자애(慈愛)와 효도(孝道)가 함께 매우 돈독하셨다.

8세 때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는데, 그 주선(周旋)함이 모두 절도에 맞고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도 맑아서 교문(橋門)을 에워싸고 듣는 인사(人士)들이 서로 경하(慶賀)해 마지 않았다. 이 해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였으며, 대가(大駕)를 따라 영희전(永禧殿)의 수용(晬容) 앞에 배례(拜禮)하고 영소전(永昭殿)을 배알(拜謁)하였으며, 인하여 사부(師傅)ㆍ빈객(賓客)과 춘방(春坊)의 요속(僚屬)들에게 명하여 매일 주연(冑筵)에 들어오도록 하여 《효경(孝經)》ㆍ《소학(小學)》ㆍ《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책을 두루 강론하였는데, 강관(講官)과 사부(師傅)가 심화(心畫)를 보이기를 청하자 크게 ‘효제충신(孝悌忠信)ㆍ예의염치(禮義廉恥)ㆍ경이직내(敬以直內)ㆍ의이방외(義以方外) 등의 글자를 써서 주었는데 신료(臣僚)들이 돌려가며 완상(玩賞)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이 날로 더욱 진보되었으며, 서연(書筵)에서의 문난(問難)이 보통 사람의 의사 밖에서 나오곤 하였다.

일찍이 상(商)나라의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쳤을 때 끝내 과오(過誤)를 고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였을 것인가를 물으셨고, 또 서문(序文)에 이른 ‘사람의 명(名)자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한 명(名)자는 무슨 뜻인가를 물으셨으며, 또 한(漢)나라 때 사단(史丹)이 청포(靑蒲)에 엎드린 것이 왕씨(王氏)의 화(禍)에 기틀이 되었고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 물러났는데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사단이 소광과 소수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와 같은 것이 많았으니, 비록 스스로 노사 숙유(老師宿儒)라고 이르는 사람이라도 모두 하늘이 내신 분이라서 그를 미칠 수 없다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강관(講官)이 일찍이 ‘《맹자(孟子)》 칠편(七篇) 중에 어느 부분에 더욱 착력(着力)하십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시기를, ‘양혜왕장(梁惠王章)에서부터 진심장(盡心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리(義理)를 천명(闡明)하지 않음이 없는데, 어찌 어느 한 부분을 끌어내어 더욱 착력을 한다고 하겠는가?’ 하셨고, 또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기약하십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시기를, ‘능히 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곧 원하는 바는 「순(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신사년에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승하(昇遐)하시자 빈사(殯肂)에서 가슴을 치며 슬퍼하시어 곁에 있는 사람을 감동케 하였으며, 발인(發靷)할 때에 이르러서 애사(哀辭)를 받들고 노차(路次)에 오래도록 서서 애통(哀痛)하셨고, 반우(返虞)하는 날에는 교외(郊外)에 나아가 모시고 돌아오시면서 곡성(哭聲)이 끊어지지 않으시니 길에서 보는 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을유년은 곧 숙종(肅宗)께서 즉위하신 지 31년이 되는 해이다. 왕께서 세 번 상소(上疏)하여 칭경(稱慶)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전대의 역사(歷史)에는 의거할 만한 문헌이 있으며 오늘에 있어서는 꼭 행해야 할 예(禮)입니다.’ 하자, 숙종께서 비답(批答)하시기를, ‘상소 속의 사연이 비록 인자(人子)의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나, 돌아보건대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안락을 누리며 즐기는 일을 하겠느냐?’ 하셨다. 당시 숙종께서는 학문을 좋아하시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시다가 피로가 쌓여 병이 되어 한가한 곳에 나아가 조양(調養)할 것을 생각하고 계셨다.

이해 10월에 선위(禪位)의 명령이 있자 왕은 놀라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시면서 계속 글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으며, 세자궁의 요속(僚屬)을 불러서 유시(諭示)하기를, ‘밤새도록 울면서 청하였으나 마침내 회천(回天)할 수 없었으니, 합문(閤門)에 엎드려 진간(陳懇)하는 이외에 다시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하시고 장차 합문으로 나오려고 하셨는데, 그때 날씨가 춥고 많은 눈이 내렸지만 유막(帷幕)마저 제거하라고 명령하시니, 그제서야 숙종께서 이르기를 ‘너의 성심[情事]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시고 마침내 애써 따르셨다.

12년 뒤 정유년에 숙종께서 5년 동안이나 병이 낫지 않고 끌므로 수응(酬應)이 점점 어려워지자,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왕에게 청정(聽政)을 대리(代理)하도록 명하니, 왕께서 또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셨다. 그리고 수고로움을 대신하겠다는 뜻으로 힘써 명령을 받드니, 여러 신하들이 조정에 들어와 칭하(稱賀)하였으며, 특별히 고취(鼓吹)를 정지하도록 하고 여러 가지 업무(業務)를 재결(裁決)하시니, 모두가 의리(義理)에 합당하였다. 그러나 모두 하나하나를 계품(啓稟)해 아뢴 뒤에 행하였으며, 사관(史官)에게 전하는 비답 역시 승정원(承政院)에 물어서 하셨으니, 이는 감히 독단하지 않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듬해 첫봄에 팔도[八路]에 유시를 내려 농상(農桑)에 힘쓰도록 권장하시고, 백성들 중에 굶주리는 자에게는 진대(賑貸)하도록 하고 질병(疾病)으로 죽은 자는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도록 하셨다. 언제나 제도(諸道)의 감사(監司)가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때에는 번번이 꼭 불러서 보시고 힘쓰도록 경계하여 그들로 하여금 출척(黜陟)을 엄정하게 하도록 하셨고, 춥거나 더우면 근시(近侍)를 보내어 옥(獄)을 살피게 하고 가벼운 죄수는 방면(放免)하도록 하셨으며, 궁궐의 담장이 허물어져서 몰래 들어온 자가 있었는데 아무런 사사로운 뜻이 없었다 하여 용서해 주도록 하셨고, 형조(刑曹)에서 요절 공문률(邀截公文律)에 의하여 서계(書啓)를 찢어 파괴한 사람의 죄가 사형(死刑)에 이른 것을 특별히 일죄(一罪)는 적용할 수 없다 하여 비율(比律)하여 사형을 감하도록 하셨다. 신료(臣僚)는 예(禮)로써 대우하시고 종친(宗親)에게는 은혜로 보살폈으며, 대신이 죽으면 반드시 위차(位次)를 설치하여 곡(哭)을 하였고, 종신(宗臣)의 상사(喪事) 역시 관가(官家)에서 모든 것을 도와서 장사지내고, 아울러 그대로 녹(祿)을 지급하여 삼년상을 마치도록 하셨다.

왕제(王弟)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이 일찍 죽자 왕이 스스로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 지내셨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불러도 응답하지 않고 막연히 소리가 없으니, 끝이난 이 세상에서 공연히 의형(儀形)만을 생각하는구나. 가는 세월 흐르는 물 같아서 산으로 갈 날 기약이 있도다. 금양(衿陽) 떠날 날이 하룻밤뿐인데 무정한 달빛은 천추(千秋)토록 비치리라.’ 하셨으니, 실제로 인정이 극도에 이른 말씀이었다. 숙종(肅宗)께서 위예(違豫)하신 지 십수 년(十數年)이 되도록 왕이 친히 시탕(侍湯)하시면서 근심하고 애태우기를 시종(始終) 한결같이 하셨고,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실 적에 왕께서 따라가 예절로서는 마땅히 지영(祗迎)하여야 하는데, 곤전(坤殿)께서 궁관(宮官)에게 이르시기를, ‘성후(聖候)의 편치 못하심이 다른 때보다 다르시니, 내가 먼저 들어가 면전(面前)에서 문후(問候)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시고, 곧 궐내(闕內)에 들어가 문후하시고 되돌아 나오시매 지영하시니, 창졸간의 주선(周旋)하심도 진실로 정례(倩禮)에 합당한지라 좌우(左右)에서 서로 돌아보며 흠송(欽頌)하였다. 온천(溫泉)으로 행행(行幸)하시게 되어서는 왕께서는 서울에 머물러 국사를 감독토록 하셨는데, 왕께서 강두(江頭)에 나아가 지송(祗送)할 적에 우모(羽旄)가 이미 멀리 갔는데도 여전히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시며 그 초조하게 근심하는 빛이 밖으로 나타나니, 도성(都城)에서 보는 이들이 모두 차탄(嗟嘆)하였다. 경자년에 숙종의 병환이 크게 위중해지자 왕께서는 눈물을 흘리시고 황급해 하시며 종묘(宗廟)ㆍ사직(社稷)ㆍ산천(山川)에 빌도록 명하였으며, 승하(昇遐)하시게 되어 예관(禮官)이 왕위(王位)에 나아가실 절목(節目)을 올리자, 답하기를, ‘하늘이 무너지는 망극한 속에서 곧 이것을 보니 인자(人子)의 정리에 차마 이럴 수가 있는가?’ 하시다가 백료(百僚)들이 날마다 일제히 부르짖는지라 비로소 위로 자교(慈敎)를 받들겠다고 억지로 허락을 하셨다. 왕께서 이미 어보(御寶)를 받아 즉위(即位)하셨으나 모든 정령(政令)과 시행 조치를 한결같이 대리 청정(代理聽政) 때와 같이 하시면서 더욱 언로(言路)를 열고 민은(民隱)을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를 삼으셨다.

신축년에 이르러 왕께서 사속(嗣續)이 없어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하다고 여겨 우리 전하(殿下)를 책봉(冊封)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삼으셨으니, 이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중하게 여긴 까닭이었다. 세제가 다섯 번 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매, 왕께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고 또 권면하기를, ‘소심 익익(小心翼翼)하며 부지런히 하고 또 부지런히 하여 국인(國人)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고 하셨다. 당시 왕께서는 위로 혜순 대비(惠順大妃)를 받들어 모시면서 양지(養志)하는 효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경복당(景福堂)이 본래 만수전(萬壽殿) 옛터에 있었는데, 왕이 미리 이를 위해 손수 수영(修營)하시고 유사(有司)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그 편호(扁號)를 바꾸어 경복전(景福殿)이라 하였다가 임인년 상기(喪期)를 마치기에 미쳐서 대비(大妃)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어(移御)하게 하였다. 또 한 번 잔치를 베풀어 상수(上壽)를 하려고 하셨는데, 모비(母妃)께서 하려 하시지 않으시자 감히 억지로 하지 아니하셨고, 천천히 다시 틈을 타서 여러 번 말한 뒤에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받들어 올리는 물품에 이르러서도 모비(母妃)께서 백성의 힘을 덜어 주고자 하시면 역시 〈그 뜻에〉 순응하여 받들어 행하였고, 오래지 않아 다시 개진(開陳)하여 전대로 회복하곤 하였다.

일찍이 남의 늙은이를 내집 늙은이로 대접하는 은혜를 미루어 백성 중에 나이 많은 이가 있으면 꼭 은혜를 베풀어 기르시고 또 벼슬도 주었으며, 고려 왕조(高麗王朝) 묘소(墓所)에 의물(儀物)이 결함이 있으면 수신(守臣)에게 개수(改修)하도록 명하였고, 신라 왕묘(新羅王廟)에 제향(祭享)이 경건(敬虔)하지 못하면 그 후손에게 벼슬을 주어 받들도록 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사우(祠宇)에 치제(致祭)하고 김종서(金宗瑞)의 후손(後孫)을 채용(採用)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왕께서 승정원(承政院)에 하교(下敎)하시기를, ‘한번 왕위를 계승한 뒤로부터 조신(朝臣)들의 하는 바를 보건대, 조금도 나라를 돕고 보호하는 일이 없으니, 시사(時事)를 생각하매 나도 모르게 통완(痛惋)하여진다.’ 하시고, 곧 명령하여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내치고 장신(將臣)의 부신(符信)을 빼앗으며 상신(相臣)의 직임을 바꾸고 아울러 찬축(竄逐)도 행하였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변서(變書)를 올려 장상(將相)이 불궤(不軌)를 꾀한다고 하므로 왕이 유사(有司)에 모두 안험(按驗)하여 토주(討誅)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기도(祈禱)하실 적에는 연(輦)을 물리치고 소여(小輿)를 타시므로 뜨거운 햇볕이 내려 쪼이는지라, 시신(侍臣)들이 번갈아 간하고 세제 역시 간곡히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시고 밤이 새도록 노천(露天)에서 빌다가 파하고 돌아가셨으며, 인하여 정전(政殿)에 앉아서 녹수(錄囚)를 하였는데도 오히려 비가 오지 않자 다시 교단(郊壇)에 나아가 기도(祈禱)하고 비가 온 뒤에야 그만두었으며, 이듬해 또 가뭄이 들자 또 친히 사직단(社稷壇)과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기도하셨고, 죄수를 가려서 줄이고 정전(正殿)을 피하였으며 찬선(饌膳)을 덜고 음악을 거두었다가 가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회복하였다. 매양 태묘(太廟)를 알현(謁見)하시고 아무리 비나 눈이 와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조묘(祧廟)가 뒤로 조금 먼 곳에 있었으나 반드시 걸어서 나아가셨다. 일찍이 효령전(孝寧殿)에서 연제(練祭)를 지내고 제주(題主)를 다시 할 적에 북쪽을 향하여 팔을 끼고 오래 서서 계시자 시신(侍臣)이 시각이 조금 오래 되었다 하여 부복(俯伏)하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으셨으니, 그 경근(敬謹)하심이 이와 같았으며, 사친(私親)의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고 축문(祝文)과 존호(尊號)와 제사의 의식(儀式)을 정하였다. 왕께서 등극(登極)하신 후로부터, 다시 와서 추급해 숭보(崇報)하다는 일을 말하는 자가 많이 분수를 넘고 지나치면 오직 그것을 채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번번이 물리쳐서 멀리하셨다가,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이 재단하고 참작하여 청하면 그대로 따랐다. 왕께서 작상(爵賞)할 때에는 삼가고 아끼는 데 힘써서 반드시 구례(舊例)를 따르셨고 사사로이 친근한 자에게 미치는 바가 없었으며, 묘당(廟堂)에서 천거한 사람 이외에 삼사(三司)에서 승선(承宣)으로 발탁된 자는 왕의 세대를 마치도록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왕께서 항상 당론(黨論)을 깊이 근심하시어 모든 소장(疏章)에 있어 서로 배알(排軋)하는 데 간섭된 것은 대체로 조용히 진정(鎭靜)시키는 데 힘써 조금도 좌우에게 보이지 않았고, 일찍이 가뭄으로 인하여 구언(求言)하는 하교(下敎)에 이르기를, ‘붕당(朋黨)의 고질적인 화근(禍根)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한 집안 사이에도 방패와 창으로 서로 침해하니, 아! 인정(人情)과 지기(志氣)의 막힘이 어찌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경(卿) 등은 모두 대대로 녹(祿)을 받아 온 신하로서 의리상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하는데, 이 판탕(板蕩)한 때를 만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왕실(王室)을 협보(夾輔)해서 조종(祖宗)의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을 위로한다면 그대 할아버지 그대 선조가 반드시 기쁨을 이룰 것이니, 어찌 모두 그 복을 받지 않겠는가?’ 하셨는데, 조정(朝廷) 신하들이 서로 함께 이르기를, ‘이런 하교(下敎)를 받들고도 당론을 일삼는다면 우리는 곧 사람이 아니다.’고 하였다.

왕께서는 성품이 침중(沈重)하시고 말씀과 웃음이 적으셨으며, 신린(臣隣)을 접대(接待)할 때는 안색(顔色)이 온화하였는데도 바라보면 자연히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있었다. 더욱이 제방(隄防)에 엄중하시어 가깝게 모시는 자에 불령(不逞)한 사람이 있으면 깊이 주벌(誅伐)하고 절대로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시니, 궁중[宮人]이 엄숙하였다. 양가(良家)의 여인(女人)을 뽑아서 궁인(宮人)에 충당하는 명령을 정지토록 하였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사람에게 과외(科外)의 책임을 지우는 폐단을 혁파하였으며, 제로(諸路)가 재해와 흉년이 들면 상세(常稅)를 덜어 주고, 서쪽 고을이 조폐(凋弊)하면 전조(田租)를 감해 주었으며, 상평창(常平倉)에 저장된 곡식을 풀어서 도성(都城)의 백성들에게 조곡(糴穀)으로 주었고, 적몰(籍沒)한 죄인의 재산을 덜어내어 기내(畿內)의 부세(賦稅)로 채웠으며, 모든 관사(官司)와 각영(各營)에서 차인(差人)을 두고 점포를 설치하고는 이익을 노려 백성을 해치는 것을 일체 혁파하여 제거하였다. 공경(公卿)과 재상(宰相)ㆍ시종(侍從), 그리고 제도(諸道)의 사신(使臣)에게 명하여 학행(學行)ㆍ재국(才局)ㆍ지략(智略)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 법(法)이 오래 되면 폐단이 발생한다 하여 보신(輔臣)에게 그에 대한 확실한 상량(商量)을 명하여 바야흐로 군민(軍民)의 번중(煩重)한 부역을 크게 강구하여 모두 변통(變通)하려고 하셨는데, 일을 미처 성취하지 못한 채 갑진년 7월에 병에 감염되어 8월 25일에 창경궁(昌慶宮) 별전(別殿)에서 영원히 군신(群臣)을 버리시니, 재위(在位)하신 지 4년이며, 춘추(春秋)는 37세였다. 덕(德)이 있으면 수(壽)한다는 말도 징험할 수 없으니, 신(神)의 이치도 어긋남이 있나 보다.

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관(棺)을 부여잡고 부르짖으시나 미칠 길이 없어 대소 신료와 함께 왕의 공덕(功德)을 의논하고 삼가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덕문 익무 순인 선효(德文翼武純仁宣孝)’라 하고, 묘호(廟鴞)를 ‘경종(景宗)’이라 하였으며, 능호(陵號)를 ‘의릉(懿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해 12월 16일 을유(乙酉)에 왕을 양주(楊州) 치소(治所)의 남쪽 신좌(申坐)의 남쪽 신좌(申坐) 인향(寅向)의 언덕에 받들어 안장(安葬)하니, 곧 새로 고른 좋은 택조(宅兆)였다.

왕비(王妃) 심씨(沈氏)는 증(贈) 영의정(領議政)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으로, 무술년에 빈(嬪)으로 훙서(薨逝)하여 경자년(庚子年)에 추책(追冊)하여 왕비(王妃)가 되었다. 계비(繼妃) 어씨(魚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이다. 아! 왕께서는 덕우(德宇)가 혼후(渾厚)하고 기도(器度)가 침응(沈凝)하여 저위(儲位)에 계신 지 31년에 조예(造詣)가 이미 지극히 높고 원대(遠大)하였다. 그러나 그 빛나고 아름다움을 감추고 밖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자기의 처신이나 사물에 대응하시는 데에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어렵고 쉬운 것이 모두 혼연(渾然)하여 소리와 자취를 찾을 수 없었으니, 진실로 함양(涵養)한 공부에서 깊이 얻은 것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심지(心志)가 외물(外物)에 빼앗기지 않고 성정(性情)이 속사(俗事)에 얽매이지 않으셨으니, 검소함을 숭상하는 덕과 실지에 힘쓰신 정치는 보통 임금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융성함이 되겠지만 우리 대행왕(大行王)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그것쯤은 미세(微細)한 것일 뿐이다.

아! 생각건대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밤낮으로 근심하고 근로하시어 정치를 안정시키고 공업(功業)을 이룩하여 온 세상을 빛나고 밝은 대유(大猷)의 영역(領域)에 오르게 하신 지 거의 50년이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평탄하면 가파름이 있고 높으면 반드시 무너지는 그런 시기인데도 왕께서는 탁이(卓異)한 자질로 정일(精一)한 전통을 전수(傳受)하시어 계책(計策)과 공열(功烈)을 잘 받들고 지기(志氣)와 사업(事業)을 훌륭히 이으셨다.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교화(敎化)가 이루어지고 움직이지 않아도 감화(感化)가 행하여지기를 바람에 풀어 쓸어지듯이,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해 주듯이 하여 거의 주(周)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짝할 만하고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를 능가하셨는데, 하늘이 돕지 않아 성업(盛業)을 다하지 못하셨으니, 이는 한 나라의 신민(臣民)이 하늘이 다하도록 슬픔을 안고 일생을 마치도록 그리워할 바이다.

아! 슬프도다. 왕께서는 깊이 우리 전하(殿下)의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하심에 인군(人君)의 도량(度量)이 있음을 아시고 일찍이 위호(位號)를 정하여 백성들의 희망을 매어두게 하셨다. 〈궁중에〉 들어가면 서로 함께 침소(寢所)를 문안하고 어선(御膳)을 살피시며 장락궁(長樂宮)을 환희 속에 모셨고, 밖에 나가면 봉연(鳳輦)은 앞에 있고 학가(鶴駕)는 뒤에 있어 도성(都城) 사람과 사녀(士女)들이 거리와 마을을 가득히 메우고 지껄이며 흔흔연(欣欣然)하게 즐거운 낯빛으로 서로 고하였다. 그리고 병세가 점점 더하여 위급한 밤에 이르러서는 공경(公卿)과 백관(百官)으로부터 여대(輿儓)와 하천(下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려와 슬피 울며 부르짖기 를 마치 고비(考妣)의 상(喪)과 같이 하였으며, 그래도 믿는 바 있어 안연(安然)하였던 것은 단지 원량(元良)을 미리 세움으로 해서 신인(神人)이 의탁할 바 있어 그랬던 것이다. 옛날 송(宋)나라의 한 신하가 그 임금의 인후(仁厚)한 덕(德)을 찬양(贊揚)하면서, 사직(社稷)이 장원(長遠)함을 마침내 꼭 그에게 의뢰(依賴)할 것이다 하더니, 지금 종사(宗社)가 반석과 태산같이 편안하고 보조(寶祚)가 억만 년(億萬年)을 뻗어갈 기약이 있어 해우(海隅)의 생민[含生]으로 하여금 모두 함유(涵濡)함을 얻어 즐거이 인화(仁化)의 시초를 떠받들게 한 것은 실로 왕께서 전대(前代)를 빛나게 하고 후세(後世)에 드리운 융성(降盛)한 공열(功烈)과 큰 아름다움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저 어찌 인후(仁厚)함이라는 한 가지 덕(德)으로만 비교할 바이겠는가? 아! 성대하시고도 아! 성대하시도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유봉휘(柳鳳輝)가 짓고, 행 부사과(行副司果) 윤순(尹淳)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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