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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엽 18人의 [선현유묵첩先賢遺墨帖] > 고서(희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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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엽 18人의 [선현유묵첩先賢遺墨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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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중엽 18人의 선현유묵(先賢遺墨) 절첩본으로서 총 23面이다.

(1)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의 詩 

(2) 이황의 문인 오도암(吳桃巖, 吳守盈) 韻에 차운한 퇴계의 장손 이안도(李安道)의 詩 

(3) 어은(漁隱) 민제(閔霽,1339~1408)의 간찰

(4) 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1602~1673)의 간찰 

(5)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1566~1629)의 詩 

(6) 취부(醉夫) 윤결(尹潔,1517~1548)의 간찰 

(7) 사암(思菴) 박순(朴淳,1523~1589)의 간찰 

(8) 밀암(密庵) 이재(李栽,1657~1730)의 自警箴 

(9)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1571~1629)의 옥연추월담(玉淵秋月潭) 등 십영(十詠) 詩 

(10) 우수(尤叟) 민응기(閔應祺,1530~?)의 간찰 

(11)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의 詩 

(12)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1537~1597) 간찰 

(13)난고(蘭臯) 이성욱(李聲郁)? 

(14)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간찰 

(15)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1538~1571)의 詩 

(16)백사(白沙) 윤훤(尹暄,1573~1627)의 간찰 

(17)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1~1575의 臨書 

(18)하곡(荷谷) 허봉(許篈,1551~1588)의 書 5面 

(19)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의 書 

 

(3)번 어은(漁隱) 민제(閔霽,1339~1408)의 간찰에서 내용 중에 백담(栢潭담) 선생의 서간 1통을 제승(齊僧) 편에 보낸 내용이 있다. 백담(栢潭)은 구봉령(具鳳齡,1526-1586)의 호(號)로서 조선전기 대사헌, 병조참판을 지냈는데, 그 차자(次子) 구선윤(具善胤)은 강제(姜霽,1526-1582)의 딸과 혼인한 사실이 있어 간찰 말미에 쓴 제(霽)가 구봉령(具鳳齡)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선조때 이조정랑을 지낸 강제(姜霽)인 것으로 파악된다. 선현유묵에 나타난 인명에 대한 해설은 조선말기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현유묵 인물에 대한 해제 月川 趙穆(1524~1606) 2점 조목은 일찍이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평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이황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조목의 문집에는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연구와 소개이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힘썼으며,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의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蒙齋 李安道(1541~1584)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봉원(逢原), 호는 몽재(蒙齋). 이황(李滉)의 장손으로,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이준(李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봉화금씨(奉化琴氏)로 훈도 금재(琴梓)의 딸이다. 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퇴계 문하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다.

 

桃巖 吳守盈(1521~1606)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겸중(謙仲), 호는 춘당(春塘) 또는 도암(桃巖). 아버지는 좌승지에 증직된 오언의(吳彦毅)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이우(李堣)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글씨를 잘 써서 금보(琴輔)·이숙량(李叔樑) 등과 함께 선성삼필(宣城三筆)의 칭호를 얻었다. 

 

漁隱 閔霽(1339~1408) 본관 여흥. 자 중회(仲晦). 호 어은(漁隱). 시호 문도(文度). 태종의 국구(國舅).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국자직학(國子直學)에 보직되었다. 1401년(태종 1) 국구로서 여흥백(驪興伯)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부원군의 봉작(封爵)을 받았다. 

 

白石 姜霽(1526~1582) 조선시대 영덕현감, 이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명원(明遠), 호는 백석(白石). 강계굉(姜繼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세경(姜世卿)이고, 아버지는 인의(引儀) 강응청(姜應淸)이며, 어머니는 이사권(李思權)의 딸이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영덕현감을 지내고, 이조정랑(吏曹正郎)이 되었다. 

 

陽坡 鄭太和(1602~167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부친은 형조판서 정광성(鄭廣城), 모친은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현재의 서울 중구(中區) 회현동(會賢洞) 1가 17번지에 거주하였다. 정태화의 집안은 대대로 정승을 지내 조선왕조 500년간 가장 관운이 좋았던 집안으로 꼽힌다. 

 

苟全 金中淸(1566~1629) 본관은 안동, 자는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또는 구전(苟全)이다. 조목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1615년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을 탄핵하라는 북인 정인홍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乙未 正月(1595) 

 

醉夫 尹潔(1517~1548) 요약 조선시대 문신. 명종 초에 주서로서, 류쿠[琉球]에 표류한 박손의 경험담을 토대로 [유구풍속기]를 지었다. [시정기] 필화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를 위해 변명하다가 사형되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복관되었다. 성격이 고결하였고, 시에 뛰어났다. 

 

思菴 朴淳(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 사암순(思庵淳) · 은산군사(殷山郡事) · 청하자(靑霞子), 당호는 배견와(拜鵑窩) · 이양정(二養亭) · 청냉담(淸冷潭) · 창옥병(蒼玉屛),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시호는 문충(文忠) · 충민(忠愍)이다. 조부는 성균관사 박지흥(朴智興), 부친은 우윤(右尹) 박우(朴祐), 모친은 생원 당악김씨(棠岳金氏) 효정(孝禎)의 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기대승(奇大升)·정철(鄭澈) 등과 교유하였으며 [곤재우득록(困齋愚得錄)]을 쓴 정개청(鄭介淸)의 스승이다. 乙巳(1545) 

 

淸風子 鄭允穆(1571~1629)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자는 목여(穆如)이고, 호는 청풍자(淸風子)·노곡(蘆谷)·죽창거사(竹窻居士)이다. 우의정을 지낸 정탁(鄭琢)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구(鄭逑)와 류성룡(柳成龍)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음양학·병법·율학에 두루 뛰어났다. 1589년(선조 22) 사은사를 따라 명나라에 가서 선진 문물을 둘러보고 왔다. 시문집인 [청풍자문집]이 전한다. 

 

密庵 李栽(1657~173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아버지는 이현일(李玄逸)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경력 박늑(朴玏)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이휘일(李徽逸)과 이숭일(李嵩逸)에게 배웠다.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여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이재는 주리론(主理論)으로 영남학파를 이끌었으며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견해는 태극(太極)에 동정(動靜)이 있어서 음양이 나뉘고 오행(五行)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하고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나고 영묘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일용동정(日用動靜)의 체용(體用)이 될 만한 묘법을 갖추었다고 주장하였다. 

 

尤叟 閔應祺(1530~?)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백향(伯嚮), 호는 우수(尤叟) 또는 경퇴재(景退齋).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5년(명종 20) 왕자(광해군)의 사부(師傅)가 되어, 선조연간에도 그 직에 머물렀다. 벼슬은 현감에 그쳤으나, 민응기가 가르쳤던 광해군이 1608년 즉위하여 왕자 때의 사부였던 민응기를 하락(河洛)·박광전(朴光前) 등과 함께 추모하면서 제물(祭物)을 내려주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당상관으로 증직하라는 전교가 있어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용학석의(庸學釋義)]가 있다. 

 

惺齋 琴蘭秀(1530~1604)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 금난수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소학(小學)]을 배우고, 임천서당(臨川書堂)에서 강학하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에게 수학하면서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구봉령(具鳳齡), 이국량(李國樑) 등과 교유를 맺고 서로 강론하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처남 조목과 함께 [심경(心經)], [주서(朱書)],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계당(溪堂)에서 김진과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강의를 들으면서 자질을 더욱 높여나갔다. [심경]은 금난수가 평생 동안 가장 심복한 책으로써 이황으로부터 직접 전수를 받아 강학에 힘쓴 책이었다고 전해진다.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9년 봉화현감에 임명되었다. 

 

大笑軒 趙宗道(1537~1597)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아버지는 참봉 조언(趙堰)이며, 어머니는 부사 강희신(姜姬臣)의 딸이다. 어려서 정두(鄭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한 뒤 천거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이 때 이황(李滉)의 문하생들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하였다. 그 뒤 사도시직장(司imagefont寺直長)·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장례원사평 등을 역임하였다. 壬辰 九月(1592) 

 

蓬萊 楊士彦(1517~1584) 본관 청주(淸州). 자 응빙(應聘). 호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평창군수(平昌郡守)·강릉부사(江陵府使)·함흥부사·철원군수·회양(淮陽)군수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安邊)군수로 재임 중 익조(翼祖)의 무덤인 지릉(智陵)의 화재사건에 책임을 지고 귀양 갔다가 2년 뒤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시(詩)와 글씨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큰 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렀다. 그의 시풍은 이별과 상사(相思)의 서정적인 시와 낭만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로서 16세기 문단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집에 [봉래시집(蓬萊詩集)]이 있다. 

 

蘭臯 李聲郁(?) 

 

白沙 尹暄(1573~1627) 본관 해평(海平). 자 차야(次野). 호 백사(白沙). 성혼(成渾)의 문하생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7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이 되었다. 1599년 호조좌랑, 1605년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1612년 황해도관찰사로서, 죄인 김직재(金直哉)를 압송할 때 후대하여 삭직되었다. 

그뒤 복관되어, 1624년(인조 2)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로서 적과 싸웠으나, 안주(安州)를 빼앗겼다. 이어 병력 ·장비 부족으로 평양에서 철수하여 성천(成川)으로 후퇴하였다. 전세를 불리하게 한 죄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 효시(梟示)되었다. 문집에 [백사집]이 있다. 

 

巴山 柳仲淹(1538~1571)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 경문(景文), 호는 파산(巴山)이다. 참봉을 지낸 공석(公奭)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정숙하여 퇴계 문하의 안자(顔子)라고 불렸다. 퇴계 선생이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크게 될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과거 시험장에서 글을 작성한 종이를 제출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스승인 이황과 서찰을 주고받으며 경전과 예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타양서원(阤陽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파산일고(巴山逸稿)] 1책이 있다. 

 

孤山 黃耆老(1521~1575) - 臨書 조선 초기~중기에 활동한 서예가이다.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 · 매학정(梅鶴亭)이다. 

 

荷谷 許篈(1551~1588) 조선 중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 엽(曄)의 아들, 균(筠)의 형이고,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그의 시는 청신완려(淸新婉麗)하며, 특히 고가행(古歌行)은 성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다. 이달은 7언절구에는 소동파(蘇東坡)의 구기(口氣)가 있으나 대체로 이백(李白)의 유법(遺法)을 얻었다고 칭찬했으며, 특히 장유(張維)는 그를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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